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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reviews

굿 플레이스, 사후 세계는 이런 곳이었으면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by bbubboo 2022. 5. 25.

내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드라마, 엔딩을 보고도 다시 보게 되는 작품은 바로 넷플릭스 <굿 플레이스>이다.

실은 정주행이라는 말이 의미가 없는 것이 이젠 일을 할 때 배경음악처럼 듀얼 모니터 하나에 이걸 틀어놓고 있다.

사후 세계 그리고 윤리를 다루면서도 이걸 너무 무겁지 않게 웃으며 가볍게 볼 수 있도록 적당한 무게감으로 풀어놓은 연출이 놀라웠다.
회차당 20분으로 구성하여 언제든지 가볍게 플레이할 수 있고, 시트콤이면서도 조금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마지막에는 나름대로 충격 반전도 담고 있어 처음 이 드라마를 보던 때에는 도무지 중간에 시청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회차에 20분인 게 의미가 있나' 생각했지만 별수 없이 시즌 통째로 전부 시청하고 말았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 안나 역할 성우인 크리스틴 벨(엘리너 역)로 대표하는 배우진들의 대사 전달력이 너무나 좋아서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쉐도잉 하기 좋은 성지로 꼽히기도 한다. 실은 나도 굿 플레이스 대본을 보며 하기도 했었다.


■스포일러 따위 없는 간략 줄거리

굿 플레이스

미국의 피닉스 주에 살고 있던 엘리너, 어느 날에 새로운 곳에서 눈을 뜬다.
'Welcome! Everything is fine.'이라고 쓰여있는 벽지를 보고 마음을 편하게 먹는데
이곳 굿 플레이스의 설계자인 마이클의 말을 듣고 자신이 교통 사고에 의해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
다행하게도 생전에 했던 선행들 덕분에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굿 플레이스'에 도착하여 이젠 완벽한 이웃들과 소울메이트와 함께 즐겁게 사후 세계를 보낼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실은 엘리너가 굿 플레이스에 들어온 건 실수였다.
주인공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기적이라 선행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었다. 원래는 배드 플레이스 소속이었던 것입니다.
온갖 모양의 고문이 자행되는 무서운 지옥 같은 배드 플레이스에 가고 싶은 사람이 없고 엘리너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실수를 비밀로 하고 머물기로 한다.
그리고 생전 윤리학 교수였던 소울메이트인 치디에게 윤리를 배우면서 진짜 굿 플레이스에 어울리도록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과연 엘리너는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굿 플레이스에 정착할 수 있을까?


■여기부터는 스포 있는 내용과 감상

시즌1에서 시즌4까지 굿 플레이스의 크루들 모든 여정을 사랑하지만 내가 제일 사랑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끝, 크루들이 여정 끝에 정말 굿 플레이스에 당도한 후의 이야기다.

넷플릭스 굿 플레이스의 '굿 플레이스' 묘사는 그동안 내가 상상했던 천국의 모습과 그에 대한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어느 누구에게나 힘든 요즘 내 삶 역시나 쉬운 적 없었고 나는 생과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해 많은 상상을 했었다.

과학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사후 세계라는 건 없고 생을 마감하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걸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불공정한 조건에 태어나고 그저 삶을 견뎌내 왔을 뿐인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무조건 보상받고 싶다기보다 알 수 없던 그곳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삶에서 더 활기가 돈다는 걸 알아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후 모습을 상상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동양 쪽 사상처럼 우리들이 계속 윤회하는 거라면 이번 삶이 끝나도 또 다음, 그리고 다음 삶에서 고통받게 되는 것일까? 상상만 해도 벅차서 그 길을 따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한 번 사는 인생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서양 종교를 믿기에도 너무 나이브한 것 같다.
굿 플레이스 제작진들도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내가 본 굿 플레이스가 사후 세계로서 시스템이 완벽하다 느끼는 건 3가지 이유이다.

1. 천국에선 아무런 제약 없이 모든 원하는 걸 할 수 있다.

시즌4 중에 타하니가 1000개나 되는 버킷리스트를 다 해버리는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현실을 살아갈 때도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다. 타하니처럼 목공을 배우고 싶고 치디처럼 소설도 마음껏 읽고 싶고 마이클 같이 악기 마스터하거나 제이슨처럼 춤도 추고 싶다. 그렇지만 돈도 없고 시간은 더더욱 없고 체력도 없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것과 재미난 것이 정말 많은데 시간과 체력이 넘치면 돈이 없거나 돈이 있으면 시간이나 체력이 달리니 이렇게 슬플 때가 없다.

내가 가장 활발할 때 내가 가장 꿈꾸던 모습을 택해서 그 어떠한 죄책감도 제약도 없이 마음껏 배울 수 있다는 것, 내가 생각했던 천국과 가장 가까운 풍경이다.

2. 삶의 끝을 직접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있다.

드라마 굿 플레이스에서 처음 나오는 천국은 진짜 '천국'은 아니었다.
선사시대부터 최근에 죽은 사람들까지, 영원히 끝나지 않는 파티에서 원하는 것들을 무한하게 제공받지만 그래도 행복하지가 않다.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것이다.
어둠이 있어야 빛도 있는 법이고 결핍이 있어야 충족도 있는 것이다. 무한하게 채워지는 욕구는 점점 무자극이 된다.
그래서 굿 플레이스 크루는 다시 '끝'을 맞이할 수 있게 했다. 마지막이 있다는 것으로도 모든 행동에 활력이 도는 거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보면 모든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각자의 끝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난 얼마큼 내 삶을 준비해야 할까? 가끔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불안에 떨며 영원히 사는 거보다는 너무 가까운 시일에 죽더라도 진실을 아는 것이 마음 편해질 수도 있다.

3. 지옥은 벌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고 발전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세상엔 나쁜 사람도 많지만 그들은 생에서 그에 맞는 대가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사후 세계가 그런 장치가 되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만약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그게 지옥의 기준점을 넘었고 이후에 뉘우치더라도 돌이킬 수 없다면 어떤 이가 더 나은 행동을 하고 싶을까? 이 드라마에선 지옥에 가는 것이 확정되었어도 크루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착한 일을 도왔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데 명확한 기준이 있어서 자신의 문제를 극복해낸 사람들만 천국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어떤 사후 세계의 모습보다도 가장 훌륭하고 합리적이다.

아마도 나는 진심으로는 종교를 믿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내가 원했던 그런 사후 세계를 그릴 수는 있지 않을까?
내 사후 세계를 책임지는 종교는 드라마 굿 플레이스로 결정하련다.
현실이 버거워서 원하는 걸 포기해야 할 땐 굿 플레이스에서 버킷리스트를 이루어낼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견디고 큰 실수를 한 경우 죄책감에 휩싸여 앞으로 나아갈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땐 배드 플레이스에서 반성할 수 있으니 주저앉지 말고 살아야지.

부디 굿 플레이스에 있던 현실 '더그 포셋'이 있어서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다 괜찮다고 하는 굿 플레이스의 안내를 받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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